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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 > 회원전용 > 번역이야기  
제 목

고전번역 비평-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작성자

관리자

날 짜

2007-03-22

파 일

조회수

2033


아리스토텔레스의 ꡔ니코마코스 윤리학ꡕ

철학사상 처음으로 윤리학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유명한 저서이긴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이 매우 드문 편이다.
최근 이창우 ․ 김재홍 ․ 강상진이 공동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번역하기 전까지만 해도 최명관 숭실대 명예교수의 ‘니코마코스 윤리학’만을 접할 수 있었다.
한석환 숭실대 교수가 지난달 출간된 이창우 외 2인의 본격적인 원전 번역본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을 꼼꼼히 살폈다.

이창우 외 2인 譯, 최초의 본격적인 원전 번역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붙들고 씨름하는 물음의 내용이다/ 그의 관심은 신(들)의 삶이나 짐승들의 삶(?)이 아닌 인간의 삶에 있다. 또 아무리 좋은 삶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실제로 영위할 수 있는 삶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그의 문제의식은 인간이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은 어떤 삶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일련의 논의 끝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결론은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덕을 드러내 보여주는 행동의 삶이 그런 삶이라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처음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1966년 최명관 (숭실대 명예교수)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무엇을 대본으로 하여 번역했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을유문화사와 서광사(1984)를 거쳐 지난해 훈복문화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최명관 역은 최초의 한국어판으로서 고전철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철학하는 사람들 치고 최명관 역의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 달 이창우(가롤릭대) ․ 김재홍(숭실대) ․ 강상진(목포대)에 의해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 고대 그리스 원전을 3인의 전공자가 5년간 공들여 번역한 결과물이다. 최초의 본격적인 원전 번역이라 하겠다. 말미에는 용어해설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는 한편, 왜 새로운 번역어를 선택했는지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한글세대에 의한 제대로 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2006)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3인의 공동번역은 기존의 번역어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번역어를 채택하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탁월성’이라는 ‘아레테’의 번역어이다. 통상 ‘덕’으로 번역되던 ‘아레테’가 인간의 기능이나 본성을 지속적으로 잘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마땅히 ‘탁월성’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다른 맥락에서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국어에서 탁월성이란 근본적으로 ‘~의 탁월성(~에서 빼어남)’이기 그냥 탁월성이라고 하면 ‘팔다리가 잘려나간 풍뎅이’를 모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와 대조적인 ‘카키아’는 종전처럼 ‘악덕’으로 번역했는데 여기서는 ‘[악]덕’을 그대로 두었는가. 아레테를 ‘탁월성’이라 할양이면 ‘카키아’는 ‘열등함’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아레테’를 ‘능숙함’(VI 5)이라 옮겨 일관성이 없는 경우도 보인다.
‘아가톤’은 ‘좋음’으로 번역했다. 기존의 ‘선’보다 훨씬 나은 번역어이다. 그렇다면 ‘카키아’동 ‘악덕’보다 ‘나쁨’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헤도네’는 ‘즐거움’으로 번역했다. ‘쾌락’이라는 한자말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되는 ‘뤼페’도 ‘고통’이라기보다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 듯 싶다. 제5권에서는 ‘정의’와 ‘부정의’가 논의된다. 그러나 ‘디카이오쉬네’와 ‘아디키아’는 각각 ‘정의’와 ‘불의’로 옮기는 편이 조어(造語)면에서 나았을 듯싶다. ‘아이스테시스’의 번역에서는 ‘감각’과 ‘지각’이 혼용되고 있다.
‘헥시스’는 ‘품성상태’로 번역했다. 이때 ‘품성’은 ‘稟性’이 아니라 ‘品性’일 텐데 그렇게 되면 ‘성격’과 별반 다를 바 없게 되어 ‘헥시스’와 ‘에토스’가 구별되지 않게 된다. 원래 ‘헥시스’란 ‘영혼의 상태’서 영혼이 어떻게 틀 잡혔는가를 뜻하는 말이다. ‘테크네’는 ‘기예’로 번역했다. 예술적 기량의 면을 부각시키기 위함일 것으로 짐작되나 테크네가 앎의 일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도 ‘기예’와 ‘기술’이 혼용되고 있다.
기술과 학문의 분과가 별다른 기준 없이 ‘~학’과 ‘~술’로 번역되고 있다. ‘의술’, ‘조선술’, ‘마술’이 있는가 하면, ‘가정경제학’, ‘정치학’, ‘수사학’이 나온다. 어떤 기준으로 이렇게 번역하였는가. 일관성을 고려한다면 ‘가정관리술’, ‘정치술’, ‘수사술’,로 옮기지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의술’(I 1)과 ‘의학’(X 9), ‘정치학’(I 2)과 ‘정치술’(VI 8)이 혼용되고 있다. 공동번역이기 때문일까.
3인의 공동번역은 상당히 많은 대괄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역자들이 최대한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보다 더 정확한 의미 전달과 가독성을 함께 고려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괄호의 남용은 독자로 하여금 선입관을 갖게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덧붙인 괄호가 오히려 가독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독자로 하여금 독서를 잠깐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경우를 보자. (1) “그렇기에 그들이 행하는 것은 탁월성에 딸 행하는 것이 아니면서[그저]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Ⅳ 3) 여기서 ‘그저’라는 말이 없어도 문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2) “이런 까닭에 테티스[여신]또한 제우스에게 베풀어 준 선행들을 이야기 하지 않았으며…”(Ⅳ3)여기서 ‘여신’의 첨가어는 필요치 않다. 각주에서 “테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여신으로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3) “아마도 그들이 생각하는 즐거움이나 그들이 추구한다고 말하는 즐거움이 아닐 것이며,[사실]그들은 오히려 동일한 즐거움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Ⅶ 13) 여기서‘사실’이라는 괄호는 필요치 않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문장에서 ‘그들’이라는 단어가 4번 나옴으로서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인칭대명사, 지시대명사 등의 번역은 융통성을 보이는 게 좋다. (4) “많은 사람[다중]들이 그러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은]많은 사람들[다중]이 즐거움으로 기울어지며 여러 가지 즐거움들의 노예가 된다고 말한다.” 이들 예에서 ‘많은 사람’ 다음에 [다중]이라는 첨가어가 꼭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이 든다.
대괄호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1) “이때의 동등함은 저[기하학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것이다.” (Ⅴ 4)[기하학적]이라는 괄호를 사용함으로써 원문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2) “이러한 친애들은 [선행의] 우월성에 근거하는데. 부모님들이 존경을 받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Ⅷ 11) 여기서 [선행의]라는 첨가어가 없다면 우월성이 선행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임을 선뜻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나 번역이라는 게 어차피 역자의 해석이 가미된 것일진대 굳이 괄호를 사용할 필요 없이 노출시켜도 무방하리라 본다.
잦은 복수형 사용도 거슬린다. ‘다중’이 복수형인데 왜 ‘다중들’이라고 해야 하는가. ‘모든 품성상태들’에서도 ‘들’을 없애는 게 낫다. ‘모든’에 이미 복수의 뜻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굳이 복수형을 쓰지 않아도 복수의 뜻을 담아내는 경우가 많다. 복수형을 쓰면 외려 거추장스럽다. 그외 ‘만들어지는’에서처럼 수동형을 사용하는 것이나 ‘~에 있어서’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한국어 어법에 어울리지 않는다.
제1권 제2장에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나오고 제10권 마지막장에는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이라는 말이 나오나 아무런 주해도 없다. 다른 개념들에 해설과 각주를 다는 데 비하면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윤리학의 학적 위상에 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총기획적’이란 ‘아르키테크토니코스’의 번역어로서 정치학을 규정하는 표현이다. 정치학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하다는 것은 그것이 다른 모든 실천적 과학의 목표를 포함하고 그것들을 내용으로 갖고 있다는 말이다. ‘건축학’(architecture)이 ‘아르키테크토니코스’에서 파생된 점을 감안하면 ‘건축학적’으로 번역해도 좋겠으니 ‘총기획적’이라는 말이 더 적합해 보인다. 다만 이 번역어가 최명관 역에 나오므로 그런 것쯤은 언급해두는 것이 학적으로 성실한 태도가 아닐까.
흠 잡자고 덤비면 어떤 번역인들 배겨낼 수 있겠는가. 이창우 ․ 김재홍 ․강상진 36인의 공동번역은 특장이 훨씬 더 많은 번역이다. 당분간은 한국어 표준판의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제3의 한국어판이 나와 자리를 넘보기까지는. 그러나저러나 아무리 번역이라지만 번역체의 문장이 아니라 원래 우리말처럼 술술 읽히는 번역은 언제쯤이나 만날 수 있을까. 한석환 / 숭실대 ․ 철학

- 필자는 델리대에서 ‘라마누자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한 비교연구’로 박사를 받았다. ‘인도철학사’ 등의 역서와 ‘이거룡의 인도사원 순례’ 등의 저서가 있다.
<교수신문 2006.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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