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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고전번역 비평- 최고 번역본을 찾아서

작성자

관리자

날 짜

2007-03-22

파 일

조회수

2049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하이젠베르크의 국내 번역본은 김용준 전 고려대 교수의 번역 한 종뿐이다. 1980대 초 번역된 이래 최근까지 절판되지 않고 생명력을 유지하며 두루 읽히고 있다.
고인석 이화여대 교수가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도 적합한지, 또한 전문가가 아닌 대학생 ․ 대학원생들이 읽기에도 적합하게 번역이 되었는지를 위주로 검토해보았다.

김용준 역 적극 추천…일반인 위한 배려 필요

필자가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그 때 나는 이 책에 매료되었고, 그 이후로 이 책에 대해 다른 인상을 가져본 일이 없다. 그 다음해엔가 독일어 원문의 복사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몇 년 전 독일어판 문고본(Piper출판사)을 한 권 구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김용준 교수의 번역(지식산업사, 1982초판, 2005)을 읽으며, 학생들에게도 유보조항 없이 그것을 권한다. 이 책은 자연과학 영역의 교양서적을 찾는 이에게 필자가 지금도 첫 번째로 권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견한 공헌을 비롯해 20세기 초반 양자역학의 구축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가 1969년에 펴낸 저서다 그것은 일종의 회상록이지만, ‘원자물리학을 둘러싸고 펼쳐진 대화’(Gesprἅche im Umkreis der Atomphysik)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저자의 독백보다는 여러 인물들 간에 벌어진 대화 형태에 의존하고 있다. 물론 일흔을 바라보는 저자가 50년의 세월을 돌이켜보며 쓴 이 책은 머리말 서두에 인용된 투키디데스의 정신처럼 글쓴이의 기억과 더불어 각 상황의 맥락을 토대로 한 사후적 재구성이 이뤄낸 산물이다.
필자는 이번 번역비평을 맡은 계기로 다시 한번 김용준 교수의 번역을 검토하며 읽어봤다. 하지만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는 몇 군데를 발견하는 데 그쳤을 뿐, ‘흥미로운’(?)비평을 쓸 수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김용준 교수의 ‘부분과 전체’는 한 마디로 잘된 번역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마음속의 강한 불편함이나 동요 없이 계속 읽어 내려갈 수 있게 하는 우리말 텍스트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몇 군데 용어 선택에서 재고를 제안하고 싶은 사항이 있고 특히 역자가 현재의 우리말 학술용어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콕 짚어서 오역이라고 할 만한 점은 찾아내지 못했다. 이 번역은 말하자면 이 책의 ‘존재 의미’라는 관점에서 볼 때 중심목표에 도달하고 있다.
읽는 이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꽤나 생생하게 ‘저자와의 만남’을 매개한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이 책 속에서 하이젠베르크라는 매력적인 저자뿐만 아니라 닐스보어, 알베어트 아인슈타인, 볼프강 파울리, 에르빈 슈뢰딩어 같은 20세기 과학의 거장들을 그들의 ‘인간적’면모까지 느껴가면서 만나게 된다.(이 책은 그들과 평생 학문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교류하며 살았던 저자만이 쓸 수 있었을 책이다.)
솔직히 말해 필자는 역자가 훌륭한 번역을 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은 원저자의 글이 지닌 담백하고 개방적인 성격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역자 역시 원문으로부터 담백하고 개방적인 우리말 번역을 빚어냈고, 이것은 분명 역자의 공헌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과 칸트 철학의 관계를 두고 그레테 헤르만과 저자 그리고 바이트제커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화(10장)는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될 뿐만 아니라 풍부한 과학적-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역자의 번역은 독자를 매끄럽게 토론의 중심으로 인도해 간다.
물론 이따금 번역자가 좀 더 친절한 안내자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은 부분도 있다. 예컨대 맨 뒷부분 바이츠제커의 대화(20장)에서 주제가 된 ‘양자논리’ (Quantenlogik) 이야기나 실증주의를 둘러싼 (17장) 같은 경우, 대화의 상황만 제대로 파악되면 대략 이해가 가능한 곳들과는 달리 조금 느리고 차근차근한 서술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물리학적 지식과 철학적 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는 전공자라면 ‘자비의 원리’를 갖고 다소 역자를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보면 읽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독자라면 텍스트를 거듭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덧붙여 필요하다면 도운이 될 만한 약간의 설명을 역자주의 형태로 덧붙이는 일도 고려해볼 만하다.
예컨대 17장에서 실증주의를 둘러싼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의 토론 가운데 파울리가 “지금 말씀하신 대로 사람들이 양자이론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물리학이란 […] 두 가지 순수한 철학 사이의 접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라고 한 말은 어투 수정까지 포함해서 “그럴 경우 [이는 문단과 연결되면서 ‘실증주의자들의 입장을 좋아 모든 학문적 개념이 완전히 명료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우’를 뜻한다] 사람들이 양자이론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되리라는 자네의 말은[…] 물리학이 두 종류의 철학이 만나는 접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는 뜻인가?”라고 바꿀 때 문맥 속에 안착되리라 생각한다. ‘두 종류의 철학’에 대한 역자주가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또 이곳 말고도 파울리와 저자가 주고받는 말은 모두 “…하게나” 투로 바꾸는 편이 더 적절하다.
또한 제목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더 언급해 보기로 한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원문의 부제목이 번역에 빠져 있는 점이 아쉽다. 어렵지 않은 일이니 새로운 책을 찍을 때는 꼭 포함되었으면 한다. 또 원문에는 모든 자의 제목에 특정한 시기를 나타내는 연대가 나타나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앞의 세 챕터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어 의아하게 한다. 2장의 제목은 ‘물리학을 연구하다’보다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다’가 더 좋겠다.
다음으로 거론하고 싶은 점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매력으로 피자는 20세기 과학의 거인들을 생생하게 만나게 해준다는 점을 꼽았는데, 만일 지금 말하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독자가 알아차리기 어렵다면 아쉬운 일이다.
이 점은 사실 고민거리다. 저자 자신이 등장인물들을 자주 성 대신 이름으로만 드러내면서 그렇게 하는 이유까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한에서 조금 변형된 원칙을 일관성 있게 적용해도 좋으리라고 본다.
예컨대 처음부터 끝까지 거듭 등장하는 ‘볼프강’은 닐스 보어와 더불어 저자와 평생에 걸쳐 아주 밀접한 인간적-학문적 교류를 유지했던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이며, ‘카를 프리드리히’ 혹은 종종 그냥 ‘프리드리히’로 나타나는 인물은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ἅcker)인데, 현재 번역 상태에서는 인물의 이름이 성인지 아니면 부르는 이름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16장의 역자 주에 나오는 ‘湯川秀樹’는 ‘유카와 히데키’로, 19장의 ‘李政道’와 ‘楊桭寧’은 각각 ‘리충디오’(또는 ‘리정다오’)와 ‘양첸닝’으로 표기하는 것이 좋겠다. 외국 인명을 우리말로 어떻게 표기해야 옳은가는 토론거리가 될 만 까다로운 문제지만, 이 책을 읽을 젊은 세대를 도금 더 고려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방사능 베타붕괴 때 대칭성에서 뚜렷한 이탈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밝힌 사람은 중국 태생의 여류 과학자 우첸슝(Wu, Chien-Shiung:吳健雄)이었는데, 19장 원문의 ‘Wu'가 번역에서 간과됐다.
그밖에 9장에 나오는 'Erbgut'은 ‘유전물질’이나 ‘유전형질’(이 둘은 상이한 개념이지만 둘 다 맥락에 적합하고 ‘유전자질’보다 낫다)로, ‘Selektionsprozess’는 ‘도태’가 아니라 ‘자연선택의 과정’으로, 10장 서두의 ‘Quantenelektrodynamik’은 ‘양자전기역학’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10장 중간에 나오는 그레테 헤르만의 말에서 ‘사상’(事象)이라는 부담스러운 낱말은 공연히 독자를 위축시킨다. 거기서‘Ereignis’는 ‘사건’이라고 옮기면 될 일이다/ 17장에서 “개념들의 정확한 명백성”은 ‘개념들의 극단적인 명료성’, “명백개념”은 “명료한 개념”이 더 낫다. 그리고 ‘혹성계’는 일본식 표현이고 ‘행성계’가 옳다. 고인석 / 이화여대 ․ 과학철학

-필자는 독일 콘스탄츠대에서 ‘대응과 상보성: 과학이론의 변동과 과학의 진보에 있어서 두 요소의 역할’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읽기’ 등의 공저가 있다.
<교수신문 2006.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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